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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달성동 도동사원]
도학(道學)의 대종(大宗), 동쪽으로 오다

유림의 고장으로 일컬어지는 대구 달성군 현풍에 있는 도동서원은 대원군의 사원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고 남은 47개 서원중 하나다. 낙동강을 굽어보며 들어선 도동서원은 사당과 담장이 보물로 지정돼 있는 등 건축적으로도 가치가 높은 건물이다. 이 서원은 건축미학과 함께 겸허한 배움의 자세를 일깨우는 선비정신이 곳곳에 담겨 있다.

취재 권혁거 사진 왕규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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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동서원(道東書院)은 조선시대 문묘에 제향된 동국5현(東國五賢)중 첫머리에 꼽히는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을 모신 서원으로, 도산·소수·병산·옥산서원 등과 함께 5대서원으로 꼽힌다. 동국5현은 김굉필을 필두로, 일두 정여창(鄭汝昌),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일컫는다.

 

‘도동(道東)’이라는 이름도 ‘도(道)가 동(東)쪽에 이르렀다’는 의미를 담아 임금이 내린 것이다. 당초 김굉필 사후 그의 외증손인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서원을 건립할 때의 이름은 쌍계서원(雙溪書院)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서원이 임진왜란때 불타 없어지는 바람에 그후 다시 짓게 됐다.

 

선조 37년(1604년)에 지금의 자리에 사우와 서원을 중건했는데, 당시 이곳의 지명이 보로동이어서 처음에는 ‘보로동서원’이라 불렀다. 그후 선조 40년(1607년)에 선조가 직접 ‘도동서원’이라고 쓴 현판을 내렸다. 사액서원으로 승격하면서 이곳의 지명도 당초의 보로동 대신 도동으로 바뀌었다.

 

▲ 동서원의 강학공간인 중정당. 임금이 하사한 ‘도동서원’의 편액과 ‘중정당’ 편액이 함께 걸려 있다.

 

 

동국5현중 첫머리에 꼽히는 김굉필의 서원

한훤당 김굉필은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김종직이 함양군수로 있을 때 그를 찾아가 그의 문인이 됐다. 김굉필은 정암 조광조의 스승이기도 하다. 김굉필이 연산군때 무오사화에 연루돼 평북 희천으로 유배를 갔을 때 찰방(察訪)인 아버지를 따라 평북 어천에 와 있던 조광조가 그를 찾아와 사제의 연을 맺었다.

 

김굉필은 스스로 ‘소학동자’라 부를 만큼 소학(小學)을 즐겨 읽으며 소학의 가르침대로 살고자 했다. 소학은 유교적 윤리사상의 기본을 담고 있는 책이다. 그의 신도비 기록에 따르면 김종직을 찾아가 문인이 되기를 청하자 김종직은 “학문에 뜻을 둔다면 마땅히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광풍제월의 기상이 모두 이가운데 있다”면서 소학을 그에게 주었다.

 

김굉필은 이 말을 가슴에 새기고 소학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고 한다. 소학을 읽은 후 그가 시를 지었는데 ‘소학 가운데서 어제의 잘못을 깨닫는다’는 구절이 있다. 이를 본 김종직이 ‘이 말은 성인이 되는 근기이다’고 평했다. 퇴계 이황은 그를 두고 ‘동방도학지종(東方道學之宗)’이라고 칭송했다. 그가 동국5현의 첫머리에 꼽히는 것도 이같은 학문에 자세에 연유하는 바가 클 것이다.

 

 

원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환주문. 어른은 고개를 약간 숙여야 들어갈 수 있는 높이로 배우는 이들의 겸손한 자세를 일깨우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밑에 문을 고정시키기 위한 돌부리 모양의 장식이 있고, 지붕에도 항아리 모양의 도기를 얹어 놓았다.

 

김굉필은 벼슬에는 비교적 늦게 나왔다. 그는 성종 11년(1480년)에 성균관에 들어갔다. 그의 나이 26세때였다. 그리고 성종 25년(1494년) 행의(行義)로 천거돼 남부참봉에 제수됐다. 연산군 2년(1496년)에는 군자감주부에 제수됐다가 사헌부 감찰로 옮겼고, 이듬해에 형조좌랑으로 옮겼다.

 

연산군 4년(1498년)에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났다. 발단은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었다. 당시 춘추관 기사관(記事官)이었던 김일손(金馹孫)이 성종실록 사초에 실었던 조의제문이 세조의 즉위를 비판한 것이라고 하여 훈구파가 사림파를 숙청한 사건이다. 조의제문의 내용에 동조했거나 김종직의 문인들은 모두 처형대상에 올랐다.

 

김굉필 역시 김종직의 문하에서 공부했다는 이유로 평북 희천으로 유배를 갔다가 연산군 6년(1500년)에 전남 순천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연산군 10년(1504년) 일어난 갑자사화(甲子士禍)때 사약을 받았다. 그의 나이 51세때였다. 그러나 중종반정후 신원됐고, 선조때 영의정으로 추증돼 문경공(文敬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그는 벼슬에 나가 관청의 사무를 보면서도 강학과 전수하는 일을 폐하지 않았다고 한다. 학문의 가르침에 충실하고자 한 것이다. 그가 가르칠 때면 꽉 차서 사람들이 다 앉을 수도 없었다. 이웃마을에서 그의 강론을 듣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도 많았다.

 

 

 

정당 좌우에 서 있는 거의재와 거인재. 거의재(위 사진)는 서재에, 거인재(아래 사진)는 동재에 해당한다.

 

김굉필은 가르치는 일뿐만 아니라 도를 지키는 일에도 엄격했다. 스승인 김종직이 이조에 있으면서 임금께 건의해 밝히는 일이 없자 시를 올려 이를 풍자했다. 또 친근한 벗인 정여창이 고을의 원이 돼 금잔을 장만하자 김굉필은 ‘이처럼 무익한 일을 할줄 몰랐다’며 ‘뒤에 반드시 사람을 그르칠 것이다’고 나무랐다.

 

김굉필의 사후 그의 외증손인 정구가 그의 뜻을 기리기 위해 그가 가르치던 달성군 현풍 비슬산(琵瑟山)에 사우를 건립하고 서원을 세웠다. 이것이 쌍계서원이다. 그러나 이 쌍계서원이 불타 없어진 후 정구와 퇴계 이황이 다시 서원건립을 추진했는데, 그것이 바로 현재의 도동서원이다.

 

현재 도동서원이 들어선 대니산(戴尼山)이라는 이름도 사연이 있다. 이는 ‘공자를 받드는 산’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대니산의 ‘니’자는 공자를 의미한다. 동방도학의 대종인 김굉필을 기리는 서원인 만큼 그 위치가 갖는 의미도 남달랐을 법하다.

 

 

산의 지형을 따라 자연스럽게 건물 배치

도동서원은 대니산 기슭에 낙동강을 굽어보며 서 있다. 전학후묘(前學後廟)의 기본적인 서원 배치형태로 화려하지 않으면서 소박하고 간결한 느낌을 준다. 서원의 건물은 산의 지형을 따라 아래에서부터 위쪽으로 오르면서 자연스럽게 배치돼 있다.

 

밑에서 계단을 따라 오르면 환주문(喚主門)을 만난다. ‘주인을 부르는 문’이라는 뜻의 환주문은 작고 아담하다. 보통 키의 사람이 드나들기에는 높이가 다소 낮아 고개를 약간 숙여야 들어갈 수 있다. 이는 배움을 위해 들어오는 자세가 겸허해야 함을 일깨워주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즉 겸손한 자세로 배우라는 의미이다. 환주문으로 들어가는 바닥에는 꽃봉오리 모양의 돌부리가 장식돼 있다. 문을 고정시키기 위한 것이다.

 

정당에서 앞을 내다본 모습. 환주문의 윗부분과 수월루가 눈에 들어온다. 수월루가 있기 전에는 낙동강까지 한눈에 들어오는 경관이었다고 한다.

 

환주문을 들어서면 낮은 기단으로 대를 만들고 그 위에 다시 높은 석축을 만들어 세운 강학공간인 중정당(中正堂)을 마주하게 된다. 환주문에서 마당을 가로질러 중정당까지 기다란 돌길이 깔려 있다. 아마도 이 돌길을 지나면서 다시한번 마음을 가다듬으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게 아닐까. 높은 석축위에 자리잡은 중정당은 가르치는 이의 위엄을 담고 있는 듯하다.

 

이곳에 ‘중정당’이라는 편액과 함께 임금이 하사한 ‘도동서원’의 편액이 걸려 있다. ‘중정당’의 의미는 ‘올곧고 바른 자세’를 말한다. 중정당의 아래쪽 좌우로 학생들을 위한 기숙공간인 거인재(居仁齋)와 거의재(居義齋)가 있다. 거인재는 동재에, 거의재는 서재에 해당한다.

 

 

 

정당 기둥에 흰 띠를 두른 것은 이 서원에 모신 인물이

문묘에 배향된 동국5현의 수장이라는 점을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다.

대청앞에 놓인 판석은 횃불을 밝히기 위한 ‘정요대’이다.

 

앞면 5칸, 옆면 2칸반 규모인 중정당에서 눈길을 끄는 것이 몇 개 있다. 기둥에 흰 띠를 둘러놓은 것이나 돌길 끝 낮은 기단에 돌출된 거북, 높은 석축위에 돌출된 용머리 조각 등이 그것이다. 흰띠는 이 서원이 동국5현의 문묘에 배향된 인물이라는 점을 멀리서도 알아보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거북이나 용머리 등은 장식적 요소다.

 

중정당 대청앞에는 커다란 네모 판석이 놓여 있다. 이는 ‘정요대(庭燎臺)’라고 하여 밤에 횃불을 밝혀놓는 곳이다. 마당 한켠에는 ‘생단(牲壇)’이라고 하여 제사에 쓰일 음식을 검사하는 작은 판석이 놓여 있다. 또 담장에는 작은 사각 구멍이 있는데 이는 제사를 지낸후 제문을 태우기 위한 것으로, ‘차(次)’라고 부른다.

 

▲ 동서원 앞에 서 있는 수월루는 서원보다 한참 뒤에 별도로 건립된 것이다.

 

 

건물의 석축이나 담장 등 건축적 장식미도 뛰어나

도동서원에는 여러 곳에서 장식적인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밑에서 환주문으로 오르는 돌계단은 막돌쌓기로 돼 있다. 높이나 폭이 다르다. 반면 중정당을 받치고 있는 높은 석축은 반듯한 돌로 쌓았는데 돌의 색깔이 저마다 조금씩 달라 아름다움을 연출하고 있다. 도동서원 건축에서 또다른 재미를 주는 요소다. 환주문 지붕에 항아리 모양의 도기를 얹어놓은 것도 이색적이다.

 

 ▲ 동서원에는 장식적인 요소들이 여러 곳에서 눈에 띈다.

중정당 석축에 돌출된 조각들.

 

 도동서원의 담장도 다른 곳에서 보기 어려운 아름다움을 연출하고 있다. 보물로 지정돼 있는 이곳의 담장은 자연석으로 기초를 만들고 그위에 흙과 기와를 번갈아가며 쌓아 만들었다. 그리고 맨 위에는 기와로 지붕을 얹었다. 담장의 중간중간에는 수막새 기와로 별무늬를 넣어 멋스러움을 더하고 있다.

 

환주문 앞에는 도동서원의 창건보다 훨씬 뒤인 철종 6년(1855년)에 건립한 수월루(水月樓)가 있다. 이를 건립한 것은 보통 서원의 건축형태에 누각이 있는 것을 감안해 이에 맞추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수월루가 생기기 전에는 중정당에서 환주문을 지나 펼쳐지는 낙동강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지만, 수월루가 이런 경관을 막고 있다.

 

▲ 서원앞에 서 있는 은행나무. 김굉필의 외증손인 정구가 서원 건립과 함께 심은 것으로, 400년 넘게 서원을 지키고 있다.

 

서원 앞에는 커다란 은행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이 은행나무는 서원을 건립한 김굉필의 외증손 정구가 건립 당시 심은 것이라고 하니 400년 넘게 서원을 지켜온 셈이다. 평생 소학이 가르치는 유교적 윤리를 몸소 실천하며 살아온 옛 선비의 가르침이 몇 아름이나 될 이 은행나무의 속만큼이나 깊고 넓게 다가오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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