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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남구 고원희 가옥]
선비의 기품과 충절이 곳곳에 배어 있는 호남의 명문종가

이 집은 임진왜란 당시 호남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켜 금산전투에서 전사한 

고경명 장군의 종가로 내려오는 집이다. 

마을 앞에는 장군의 아들을 비롯한 가족 7명의 충절을 기리는 삼강문이 서 있다. 

호남을 대표하는 명문가의 종택이지만 전체적인 규모는 크지 않고 집의 외양도 화려하지 않다. 

그러나 선비의 기품과 나라를 위한 충절의 기상이 곳곳에 배어 있다.

취재 권혁거 사진 왕규태 기자 

주택저널 기사 레이아웃

 

 

▲집옆에 있는 솔숲에서 바라본 집의 모습. 집 뒤의 숲을 배경으로 안온하게 들어서 있다. 

 

호남고속철도의 개통으로 예전에는 3시간 넘게 걸리던 서울에서 광주까지 불과 1시간 30분 남짓으로 당겨졌다. 그렇다보니 평일임에도 하루 전에 이미 이른 아침시간 표가 매진될 만큼 이용자들도 많다. 열차 내부도 기존 고속열차에 비해 훨씬 편안하고 부드럽다. 좌석간 간격도 여유가 있고, 역방향도 없다. 호남고속철은 호남의 새로운 시대를 여는 느낌을 받았다.

 

대문채. 얼핏 보아서는 대문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소박한 모습이다. 실제 대문은 옆의 담장을 터서 이용하고 있다.

 

 

임진란때 의병장 지낸 고경명 장군의 종가

고원희 가옥은 광주시 남구 압촌동(鴨村洞)에 있다. 이곳은 행정구역상으로는 남구 대촌동(大村洞)에 속하는 곳이다. 광주 송정역에서 차로 불과 20분 정도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다. 남구청 홈페이지의 기록에 따르면 산이 어울려 있는 골짜기마을의 ‘올미실’에서 유래했다고 기록돼 있다.

 

군데군데 옛집의 기와지붕이 눈에 들어오는, 한눈에 보아도 조용하고 평화로운 시골마을임을 알 수 있는 압촌마을은 15세기부터 장흥 고씨(장흥 고씨)가 세거해온 곳으로 알려져 있다. 고원희 가옥은 마을의 배경이 되는 작은 산 아랫자락에 안온하게 들어서 있다. 이 집은 임진왜란때 의병장을 지낸 제봉(齊峯) 고경명(高敬命) 장군의 종가이기도 하다. 고원희(高元熙)씨는 그의 17대손이다.

 

집 뒤에서 본 안채의 모습

 

고경명 장군은 후대에 의병장으로 활동하다 금산전투에서 전사한 일 때문에 ‘장군’이란 호칭이 붙었지만, 기실은 평생 칼 한번 잡아본 일이 없는 선비였다.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해 벼슬에 나선 후 사간원과 사헌부, 홍문관 등에서 일했고, 동래부사와 영암군수 등 외직을 맡기도 했다. 무관으로 활동한 적은 한번도 없다.

 

사랑채. 크거나 화려하지만 않지만, 단정하고 기품있는 선비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그는 이율곡이 아낄 만큼 훌륭한 학식과 문재를 갖추고 있었다. 그가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와 있을 때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 등과 교유했다. 그의 문재는 송강(松江) 정철(鄭澈) 등과 더불어 식영정(息影亭) 사선(四仙)으로 불릴 정도였다. 지금도 남아 있는 제봉집(齊峯集)에는 그가 남긴 시들과 광주 무등산 기행문인 유서석록(遊瑞石錄) 등이 남아 있다.

 

그런 그가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위태로움에 처하자 나이 60이 됐음에도 자식들과 함께 호남지역에서 가장 먼저 의병을 모아 전쟁에 나섰다. 다만 당시 열여섯살이던 막내아들 고용후(高用厚)만 안동의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에게 보냈다. 집안의 대가 끊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배려였다.

 

마을 어귀에 있는 삼강문과 추원각. 왼쪽이 삼강문과 정려이고, 오른쪽이 추원각이다. 두 건물 너머 멀리 압촌마을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충절과 올바름을 새긴 ‘세독충정’의 가르침

실제로 고경명 장군의 큰 아들 고종후(高從厚)와 둘째아들 고인후(高因厚) 모두 임진왜란 당시 왜군과 전투를 벌이다 전사했다. 고종후와 동생 고경형(高敬兄)은 진주성 전투에서 김시민(金時敏) 장군을 도와 싸우다가 결국 2차 전투에서 패하자 남강에 투신해 순절했고, 고인후는 아버지와 함께 금산성 전투에서 전사했다. 지금 금산에 남아 있는 칠백의총(七百義塚)은 바로 이때의 전사자를 기리기 위해 만든 것이다.

 

비단 이뿐만이 아니다. 고경명의 둘째딸은 정유재란때 왜군의 겁박에 분을 참지 못해 칼을 안고 순절했다고 한다. 또 고종후의 장남인 고부립(高傅立)은 정묘재란때 의병장이 돼 왜군들과 싸웠고, 고인후의 차남 고부천(高傅川)은 이괄의 난 때 의병장을 지냈다. 또 고경명 장군의 조카며느리인 광산 정씨(光山 鄭氏)도 순절했다.

 

추원각. ‘세독충정’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압촌동 마을을 들어서면 그 어귀에 고씨 삼강문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이 삼강문은 바로 고씨 일가의 충과 효, 나라에 대한 순절의 내용이 담겨 있다. 이 삼강문은 고원희 가옥이 건립되기 전인 1844년에 세운 것으로 기록돼 있다. 여기에는 1충(忠)과 3효(孝), 2열(烈), 1절의(節義) 등 7명이 나와 있다. 1충은 고경명이고, 3효는 장남 종후와 차남 인후, 손자 부금(傅金)이다. 2열은 그의 딸과 조카며느리, 그리고 마지막 1절의는 그의 동생이다.

 

이 삼강문옆에는 문중에서 고경명 장군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제각인 추원각이 세워져 있다. 추원각 대청 위에는 ‘세독충정(世篤忠貞)’이라고 쓰인 현판이 걸려 있다. ‘인간이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항상 나라에 충성하고 올바른 마음을 굳게 지녀야 한다’는 뜻으로 제봉의 좌우명이었다고 한다. 문에는 ‘승훈문(承訓門)’이라는 이름이 명명돼 있다. 제봉의 뜻을 후손들이 길이 새기라는 의미일 터다.

 

집앞에 있는 정자 파향정

 

지금도 제봉산 아래에는 고경명 장군을 주벽으로 모시는 포충사(褒忠祠)라는 사당이 있다. 1601년 광주지역 유생들이 건립한 이 사당은 1603년 임금으로부터 사액을 받았다. 이곳에는 고경명 장군외에 그의 두 아들인 종후와 인후, 그리고 유팽로(柳彭老), 안영(安瑛) 등을 배향했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때도 훼철되지 않고 남았던 곳이다.

 

포충사 인근에는 눈에 띄는 비석이 하나 있다. 이름하여 ‘충노비(忠奴碑)’이다. 이 비석에 새겨진 이름은 ‘봉이(鳳伊)’와 ‘귀인(貴仁)’으로 고경명 장군의 집안 하인들이다. 이들도 장남 종후를 따라 진주성 전투에서 함께 순절했다. 고경명 장군의 집안은 반상을 가리지 않고 나라에 대한 충절을 지킨 집안인 셈이다.

 

들어열개를 통한 사랑채의 소통구조

고씨 삼강문과 추원각을 지나 오른쪽 길로 들어서면 솔숲을 배경으로 산기슭에 자리잡은 고원희 가옥이 눈에 들어온다. 고택에 못미쳐 작은 정자가 하나 있는데 이름하여 ‘파향정(把香亭)’이다. 정자 옆으로는 고원희 가옥과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콩문화센터가 있다. 어린이들이 콩과 관련된 체험시설로 활용된다고 한다.

 

 

 


삼강문과 정려 내용. 1충과 3효, 2열, 1절의의 내용이 담겨 있다.

 

대문채는 세칸 규모로 양쪽에 방을 두고 가운데 문이 위치해 있다. 그야말로 소박한 모습의 대문이다. 그냥 보아서는 대문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다. 실제로는 대문 옆으로 담장을 터서 주 출입구로 이용하고 있는데 이는 대문으로 차량 등이 드나들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고원희 고택을 들어서면 가장 먼저 사랑채가 눈에 들어온다. 대가집의 사랑채치고는 규모가 크지도 않고 화려하지도 않다. 그렇지만 담백하게 서 있는 모습이 오히려 더욱 기품있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화려한 벼슬살이를 하지는 않았지만 기품있게 살다 간 장군의 모습과 닮은 듯하다.

 

안채 중문과 곳간채

 

사랑채는 정면 4칸 규모로 사랑방에 이어 한칸 규모의 대청이 오른쪽 끝으로 약간 높게 자리하고 있다. 이 대청은 양쪽 2면이 모두 창호로 닫혀 있는데, 한쪽 창호는 들어열개로 열 수 있도록 돼 있다. 또한 사랑방에서 대청쪽으로도 들어열개가 있어 이를 통해 공간의 소통이 이루어지는 구조다.

 


안채 안방 창호. 위쪽으로 격자무늬 창이 있다.

 

사랑채 옆으로는 안채로 통하는 중문이 있다. 안채는 사랑채에 비해 규모도 크고 널찍하다. 정면 7칸에 측면 2칸반의 겹집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팔작지붕의 합각부분에 새긴 문양도 아름답다. 정면에는 안방에서부터 건넌방까지 툇마루가 이어져 있다. 가운데 두칸이 대청인데 이곳 역시 사랑채처럼 창호를 만들었다. 겹집 구조나 대청의 창호 등을 보면 아마도 이곳이 겨울에는 다소 추웠던 지역인 것으로 짐작된다.

 

안채 합각지붕의 문양이 아름답다.

 

안채 툇마루 아래쪽 모습. 공기를 통하게 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뒤쪽이 트여 필로티 형태로 돼 있다.     

 

안채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조금 높은 곳에 사당이 자리잡고 있다. 이 사당은 고경명 장군을 비롯해 그의 두 아들인 고종후와 고인후를 모시는 불천위 사당이다. 대개의 경우 종가에서도 4대 선조까지의 제사를 모시는 것이 일반적인데, 불천위란 영원히 제사를 모실 수 있는 인물로 이는 나라에서 정해주는 인물들이다.

 

사당. 고경명 장군과 그의 두 아들인 종후와 인후를 모신 불천위 사당이다.

 

 

1917년 종손의 증조부가 건립

장흥 고씨가 이 마을에 처음 들어온 것은 현 종손 고원희씨의 20대 선조인 고자검(高自儉)때다. 그가 바로 압촌마을 장흥 고씨의 중시조인 셈이다. 집에서 마주 보이는 마을 오른편 산기슭에 아래 위로 묘가 있는데, 바로 고자검과 그의 아들인 고운(高雲)의 묘이다. 당시 살던 집도 그곳에 있었다.

 

그러다가 고경명 장군이 고운의 아들이자 부친인 고맹영(高孟英)의 묘를 현재 삼강문이 있는 쪽으로 모시면서 집터도 현재의 위치로 옮겨 잡았다. 현재의 집을 건립한 이는 현재 집을 지키고 있는 종손 고원희씨의 증조부인 고종석(高琮錫)이다. 집을 지은 해는 상량문 기록에 따르면 일제때인 1917년이다.

 


고경명 장군의 부친 묘소. 이곳에 묘를 쓰면서 집터도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당초에는 지금보다 건물이 더 많았다고 한다. 콩문화센터가 있는 곳도 원래는 이 집의 일부로 고종석의 둘째 아들에게 분가시켜준 집이었다. 광주시에서 콩문화센터 운영을 위해 임대를 요청해 30년간 임대해주기로 했다는 게 고원희씨의 설명이다.

 

고원희씨의 설명에 따르면 종가에 자손이 귀해 양자들이 더러 들어왔다고 한다. 현재의 집을 건립한 고종석도 양자로 들어왔고, 그에게 아들이 둘 있었는데, 큰 아들에게는 아들이 없고 작은 아들에게 아들이 있어서 큰 집에 양자로 들어오게 됐다. 고원희씨는 바로 그 양자로 들어온 이의 아들이다.

 

콩문화센터의 장독대. 이 콩문화센터도 이 집의 일부이다.

 

마을 한쪽에는 압촌제라는 연못이 있다. 연꽃이 많이 피는 이 연못으로 인해 마을의 풍경이 더 운치있다. 고택 뒤로는 제봉산으로 오르는 산책길이 있다. 한쪽에선 숲의 나무들을 오가며 지저귀는 새들의 소리가 들린다. 숲속에는 여기저기 평상과 등걸의자도 놓였다. 시원한 솔숲의 바람이 장군의 옛 이야기를 전해주는 듯하다.

 

집 뒤에서 바라본 모습. 기와지붕이 이어지는 모습이 정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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