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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아산 윤승구 가옥]
오밀조밀한 공간구성과 별채 갖춘 종가집

충남 아산 둔포면 신항리에는 윤보선 대통령 생가를 비롯한 해평 윤씨 일가의 집들이 모여 있다. 윤승구 가옥은 이들 집중 종가집으로 불린다. 이 마을에 사는 해평 윤씨중 가장 큰 집인 셈이다. 안채와 사랑채, 별채까지 갖추고 있는 이 집은 규모는 크지 않지만, 오밀조밀한 공간구성이 눈에 띄는 집이다.

취재 권혁거 사진 왕규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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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 윤승구 가옥의 전경. 공동으로 사용하는 솟을대문이 따로 있어 바로 사랑채를 만날 수 있다. 집 뒤로 보이는 교회가 윤치호 기념예배당인 신항감리교회이다.


해평 윤씨(海平 尹氏) 일가의 집들이 들어서 있는 마을에는 입구에 높은 솟을대문이 서 있다. 이 대문은 해평 윤씨 일가가 공동으로 사용하는 문이다. 일가들이 함께 모여사는 가족공동체임을 이 문이 상징하고 있는 셈이다. 문을 들어서면 좌우로 한옥들이 들어서 있는데, 왼쪽에 윤보선 대통령 생가가 있고 오른쪽으로 윤일선(尹日善) 가옥과 윤승구(尹勝求) 가옥이 나란히 붙어 있다. 그 위쪽으로는 박우현 가옥과 윤제형 가옥이 있다.

 

옛 아산군지에 따르면 둔포면(屯浦面) 신항리(新項里)는 당초 천안군 모산면에 속해 있던 곳으로 ‘새말(新村)’로 불리는 곳이다. 임진왜란때 마을이 모두 불타 없어져 새로 건립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해평 윤씨 집안이 어떻게 해서 이 마을에 들어오게 됐는지는 나타나 있지 않고, 다만 군부대신을 지낸 윤웅렬(尹雄烈), 윤영렬(尹英烈) 형제가 살았다는 기록만 있다.

 

 

해평 윤씨 일가의 집들이 모여 있는 마을

형인 윤웅렬은 윤치호(尹致昊)와 윤치왕(尹致旺), 윤치창(尹致昌)의 3형제를 두었고, 동생 윤영렬은 윤치오(尹致旿), 윤치소(尹致昭), 윤치성(尹致晟), 윤치병(尹致昞), 윤치명(尹致明), 윤치영(尹致瑛)의 6형제와 윤활란(尹活蘭), 윤노덕(尹老德)의 두 딸을 두었다.

 

 

▲ 윤승구 가옥 옆에 윤일선 가옥이 있다. 윤일선 가옥을 시작으로 몇채의 집이 이어진다.

 

윤치호는 어렸을 때 최연소 신사유람단으로 일본을 다녀와 개화사상에 눈을 떴다. 그는 한국인 최초의 남감리교인이기도 했으며, 지금도 신항리 마을 집 뒤쪽에는 윤치호 기념예배당인 신항감리교회가 있다. 젊었을 때는 독립운동에 헌신했으나 일제 말기 귀족원 의원 활동 등을 한 것이 흠으로 남아 있다. 

 

윤치소는 사촌형인 윤치호와 함께 ‘황성신문’의 전신인 ‘경성신문’을 경영하기도 했고, 1920년에는 이상재 등과 함께 조선교육회 설립을 주도했다. 상해 임시정부와 미국에서 활동하던 이승만 박사에게 막대한 독립자금도 지원했다. 제2공화국 대통령을 지낸 윤보선(尹潽善)은 윤치소의 장남이다. 우리나라 의학계의 태두로 불리며 서울대 총장을 역임한 윤일선 박사는 윤치오의 장남이다. 

 

 

▲ 윤승구 가옥 안채와 안마당. 규모는 작지만, 격식과 함께 정갈한 느낌을 주는 집이다. 오른쪽으로 후대에 지은 것으로 보이는 벽돌건물의 일부가 보인다.

   

해평 윤씨로 이 마을에 들어와 처음 집을 지은 이는 윤취동(尹取東)으로, 윤웅렬·윤영렬 형제의 아버지이다. 그의 가계는 조선 중기의 문신인 윤두수(尹斗壽)의 후손이지만, 가계가 몰락해 그의 조부때 충남 천안으로 낙향했다고 한다. 셋째 아들이었던 그는 천안에서 아산으로 옮겨왔고, 그 자신의 근면함으로 부를 일구어 후손들의 출세를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흉년때 가난한 사람들의 관납미를 모두 대신 내주어 송덕비까지 세웠다고 한다.

 

현재 이 마을의 해평 윤씨 집들을 관리하고 있는 김덕영 마을 노인회장에 따르면 윤승구 가옥은 신항리 해평 윤씨 집들 가운데 가장 먼저 지은 집이라고 한다. 이 집이 종가댁이라고 불리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때문인 듯하다. 윤취동이 이 마을에 들어와 처음 지은 집인 셈이다. 이 집의 상량문에는 ‘숭정기원후(崇禎紀元後) 4갑진 12월1일’이라고 기록돼 있는데, 이로 미루어 1844년(헌종 10년)에 세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안채 대청. 대청 윗부분으로 난 창호가 모두 수납공간(벽장)이다.

 

윤승구 가옥 옆에 있는 윤일선 가옥은 윤취동이 차남인 윤영렬에게 살림을 내어주기 위해 지은 집이고, 윤보선 대통령 생가는 1907년에 윤 대통령의 아버지인 윤치소가 건립한 집이다. 그래서 이 마을에 해평 윤씨 일가의 집들이 여러채 있지만, 건립연대가 조금씩 차이가 있고, 시대에 따라 건축양식도 조금씩 다른 부분이 나타난다.

 

 

수납공간과 창호가 많은 안채와 사랑채

윤승구 가옥은 집의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건축적인 재미가 있는 집이다. 공간구성이 오밀조밀하면서도 나름대로 격식을 갖추고 있다. 안채와 사랑채를 나누는 작은 내외담이 있고, 안채 옆으로 별채도 마련해놓았다. 또한 집안에 수납공간과 창호가 많이 설치돼 있다는 점, 그리고 지붕 밑의 낮은 굴뚝 등이 눈길을 끄는 요소들이다.

 

 

▲ 안채와 사랑채가 작은 내외담으로 구분된다.

 

가옥의 구성은 안채와 사랑채로 이루어진 본채와 곳간채, 그리고 별채로 이루어져 있다. 밖에서 보자면 사랑채가 전면에 서 있다. 이 사랑채에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이 설치돼 있고, 오른쪽으로 별채로 통하는 작은 일각문이 있으며, 왼쪽으로 담장으로 이어진 곳간채가 돌출돼 있는 형태다.

본채는 ‘ㄱ’자형의 안채와 ‘ㄴ’자형의 사랑채가 ‘튼ㅁ’자 형태를 이루고 있다. 안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중앙에 2칸 넓이의 대청을 중심으로 공간이 배치돼 있다. 왼쪽으로 2칸의 안방과 이어 꺾인 부분에 1칸 규모의 부엌이 위치하고 있다. 안방에서 대청을 마주보고 1칸의 건넌방이 자리한다.

    

 

▲ 사랑채 기단에 길고 넓은 장대석을 사용한 점이 특이하다.

 

안채에서 몇가지 특이한 점들이 눈에 띈다. 먼저 대청 윗부분 전체와 건넌방으로 이어지는 부분까지 별도의 수납공간을 마련하고 있다는 점이다. 안채 대청위에 수납공간을 마련하는 것은 더러 볼 수 있는 형태이지만 대청 윗부분 전체를 수납공간으로 마련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수납공간의 문에 다양한 형태의 문양을 넣은 점도 이채롭다.

안채의 부엌에도 이같은 수납공간 확보의 공간구성 형태를 볼 수 있다. 안방 뒤편 쪽 툇마루 폭에 맞추어 부엌을 내밀고 수납공간을 만든 점이 그것이다. 결국 안채에 모두 별도의 수납공간을 마련하고 있는 셈이다. 이는 아마도 이 집이 종가집이라는 점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 사랑채 사랑방과 대청. 사랑방에도 아래위로 벽장이 설치돼 있다. 공간은 불발기창이 있는 분합문으로 나누고 있다.

 

안채 건넌방 앞으로는 작은 창호를 만들었으며, 그 밑에 아궁이를 설치했다. 윤승구 가옥 옆에 있는 윤일선 가옥도 윤승구 가옥과 비슷한 형태의 안채구조를 갖고 있는데, 건넌방 앞 아궁이 위로 퇴를 연결하고 높은 마루를 만들어 누마루 형식을 취하고 있다. 아마도 후대에 집을 지으면서 좀더 실용적인 형태를 취한 것이 아닌가 싶다.

    

사랑채는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겹집형태로 돼 있다. 전면에 2칸의 사랑방과 1칸의 대청이 있고, 그 뒤쪽으로도 방이 있다. 아마도 이 뒤쪽에 자리한 방들은 안채와의 소통을 위해 행랑머슴 등이 머물던 공간으로 보인다. 사랑방과 대청, 그리고 뒤쪽의 방들은 불발기창의 분합문으로 연결돼 있고, 대청의 전면에도 분합문을 두고 측면에도 창호를 설치했다. 사랑방에서 문을 개방하면 정면은 물론 측면도 밖을 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 사랑방. 벽장 앞 오른쪽으로 작은 문이 있는데 이는 안채로 통하는 문이다. 분합문 쪽으로 난 문은 작은 방으로 연결된다.

 

 사랑채 옆으로는 중문을 내었는데, 아마도 예전에는 이 중문을 통해 안채로 출입한 듯하다. 중문을 들어서면 바로 안채가 보이지 않도록 낮은 담을 설치했다. 이른바 내외담이다. 옛 사대부 가옥에서는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에는 굳이 담장형식이 아니더라도 바로 안을 보지 못하도록 내외담을 설치하는 경우가 많다.

 

중문과 내외담이 있는 사이공간에는 사랑채에 불을 지피기 위한 아궁이를 설치했다. 이 아궁이 위쪽으로도 사랑방에서 돌출된 부분이 있는데, 사랑방의 벽장이다. 사랑방 뒤편의 작은 방에도 작은 다락과 벽장을 두었다. 이 집에는 거의 모든 방마다 수납공간을 만들어 둔 셈이다. 사랑채 중문 옆으로는 헛간을 만들어놓았다.

 

 

▲ 안채 뒷면의 굴뚝과 별채의 굴뚝. 종가집에서 굴뚝을 낮게 설치한 것은 겸손한 자세와 함께 병충해 등을 없애는데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낮은 굴뚝과 장대석 기단 특이

안채 옆에는 작은 일각문이 있는 담장을 사이에 두고 별채가 있다. 이 별채는 사랑채 옆의 일각문을 통해서도 외부에서 들어갈 수 있는데, 안채나 사랑채보다 다소 낮은 높이에 서 있다. 안채나 사랑채와는 직각방향으로 앉은 정면 4칸, 측면 1칸 규모의 이 별채는 오른쪽에 부엌을 두고 있으며, 이어서 2칸의 방이 있고, 가장 왼쪽에 1칸의 대청이 있다.

  

대청에는 3면에 모두 창호가 설치돼 있어 창호를 열면 3면으로 열린 공간이 된다. 대청과 방 사이에는 역시 불발기창의 4분합문이 설치돼 있다. 별채 대청의 옆면으로는 대나무가 심어져 있는 뒤뜰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 뒤뜰은 높은 축대를 쌓아 만든 것으로 별채의 방에서 문을 열어놓으면 뒤뜰에 심은 대나무를 감상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 별채의 뒷면. 별채는 안채나 사랑채보다 다소 낮게 앉아 있다.

 

이 집에서는 낮은 굴뚝과 장대석으로 기단을 만든 점도 눈에 띄는 점들이다. 몇몇 종가의 경우 지붕보다 낮은 곳에 굴뚝을 설치하는 예를 볼 수 있는데 이집 역시 그러하다. 안채 뒤편의 낮은 굴뚝과 별채 툇마루앞의 낮은 굴뚝이 그것이다. 종가집의 굴뚝이 낮은 것은 종가집이라고 교만한 마음을 갖지 말고 늘 자세를 낮추고 겸손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안채 굴뚝의 경우 안방 뒷부분의 굴뚝은 지붕밑부분까지 올라가 있지만, 건넌방 뒷부분의 굴뚝은 벽장공간 아랫부분에 맞춰져 있다. 별채의 굴뚝은 집의 앞부분에 설치돼 있는데, 안채보다 훨씬 낮게 설치돼 있다. 굴뚝이 낮은 것은 겸손한 마음가짐과 함께 생활의 이점도 있다. 즉 연기가 낮게 퍼지면서 병충해 등을 없애는데도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장대석 기단도 특이하다. 대개의 경우 기단을 만들 때는 막돌쌓기를 하거나 작은 돌들을 쌓아 기단을 만드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 집은 안채나 사랑채, 별채 모두 긴 장대석으로 기단을 쌓았다. 특히 사랑채는 장대석 기단을 2단으로 쌓아 위엄을 갖추고자 했다. 이 역시 이 집이 종가집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별채의 방에서 마루를 거쳐 밖을 내다본 모습. 뒤쪽에는 대나무 숲이 조성돼 있다.

 

안채 옆으로는 광채가 있는데, 이들 광채는 벽돌로 지은 건물인 것으로 보아 안채나 사랑채 건립 이후에 들어선 것으로 보인다. 이 마을에서도 이 집외에 벽돌로 지은 집들이 눈에 띄는데 이는 건축연대의 변화에 따른 재료의 변화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특히 1900년대 이후에 건립된 윤보선 대통령 생가의 경우에도 이같은 시대상의 변화를 엿볼 수 있는 가옥이다.

 

아산시 둔포면 신항리 해평 윤씨 일가의 가옥들은 지금 대부분 비어 있다. 윤승구 가옥은 비교적 깨끗하게 유지되고 있는 편이지만, 바로 옆의 윤일선 가옥은 마당에 잡초가 무성해 마치 폐가를 연상케 한다. 이들 집이 당시 건축의 변화를 담은 문화재인 점을 감안하면 보다 체계적인 관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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