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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여주 영릉재실]
공간구성과 배치 뛰어난 조선시대 대표적인 재실

조선시대 효종대왕의 능인 영릉(寧陵) 재실은 조선시대 왕릉 재실의 원형이 거의 그대로 남아 있다. 안향청과 집사청, 제기고 등 재실의 기본형태를 두루 갖추고 있으며, 지금도 묘제때는 후손들이 모여 제례를 드리고 있다. 당초 경기도 양주에 있던 왕릉이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함께 옮긴 재실은 공간구성과 배치가 뛰어난 조선시대 대표적인 재실로 꼽힌다.

취재 권혁거 사진 왕규태 기자 항공촬영 사진 블루버드 항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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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릉재실 전경. 대문과 행랑이 가장 앞에 위치하고, 안쪽에 왼쪽부터 안향청과 집사청, 재실이 나란히 배치돼 있다. 재실 앞에 있는 것이 제기고다. 2 효종대왕릉의 모습. 왕과 왕비의 무덤을 아래위로 배치한 동원상하릉으로 조성됐다.

 

여주에는 비슷한 이름의 왕릉이 2개 있다. 영릉(英陵)과 영릉(寧陵)이 그것이다. 영릉(英陵)은 조선 세종대왕(世宗大王)의 능이고, 영릉(寧陵)은 효종대왕(孝宗大王)의 능이다. 두 능 모두 세종대왕 유적관리소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700m 정도의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다. 왕릉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별도로 조성돼 있다.

 

이들 두 왕릉은 여주 시내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여주터미널에서 택시로 10분 정도의 거리다. 여주시내에서 왕릉까지 하루 세차례 운행하는 버스가 있지만, 요즈음은 운행하지 않는다고 한다. 서울에서 승용차를 이용하면 중부내륙고속도로 서여주IC에서 5분 거리에 있다. 영동고속도로 여주IC에서는 10분 거리다.

 

효종대왕의 왕릉인 영릉은 당초 이곳에 있던 것이 아니다. 1659년 경기도 양주군 건원릉(현 구리시 동구릉)의 서쪽에 조성해 능호를 익릉(翼陵)이라고 했다. 그런데 1673년 석물에 틈이 생겨 능을 지금의 위치로 옮겨오게 된 것이다. 능호도 현재의 영릉으로 고쳤으며, 재실도 함께 옮겨왔다.

 

효종대왕릉의 모습. 왕과 왕비의 무덤을 아래위로 배치한 동원상하릉으로 조성됐다.

 

세종대왕의 능이 합장릉인데 비해 효종대왕의 능은 왕과 왕비의 무덤이 따로 조성돼 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왕과 왕비의 무덤을 좌우로 나란히 배치하지 않고 아래위로 만든 동원상하릉(同原上下陵)이라는 점이다. 이는 조선 왕릉중 최초의 형태로, 풍수지리상 생기왕성한 정혈(正穴)에 능침을 두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효종대왕 릉에서 또하나 눈길을 끄는 것은 금천교를 참도의 중간에 만들었다는 점이다. 금천교(禁川橋)는 속세와 성역의 경계를 의미하는 다리로, 왕릉에서는 일반적으로 홍살문에 이르기 전에 만든다. 홍살문은 성역을 알리는 문이며, 참도(參道)는 홍살문에서 왕에게 제향을 드리는 정자각까지 이르는 길을 말한다.

 

효종은 인조(仁祖)의 둘째아들로, 병자호란 후에 당시 세자이던 소현세자(昭顯世子)와 함께 청나라 심양에 인질로 잡혀 있기도 했다. 이후 8년만에 귀국했으며, 귀국후 형인 소현세자가 병사함에 따라 세자자리를 물려받아 임금에 오르게 됐다.

 

특히 그는 인질로 잡혀 있던 동안 겪었던 고초와 삼전도의 치욕을 설욕하기 위해 청나라를 치기 위한 북벌계획을 세웠으나 결국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임진란 이후 정유재란과 병자호란 등으로 피폐해진 민생의 안정을 위해 충청도와 전라도 근해지역에 대동법을 확대실시하기도 했다.

 

 

왕릉 재실은 능참봉이 거처하던 곳

재실(齋室)은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은 집이다. 무덤이나 사당옆에 제사에 참석하는 사람들의 숙식과 함께 제사음식을 장만하고, 음복, 망제를 지내는 곳이다. 재실의 기원은 삼국시대의 시조묘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재실이 보편화된 것은 유교문화가 정착한 조선시대 이후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1 각종 석물들이 둘러싸고 있는 효종대왕릉. 효종대왕은 북벌을 계획했지만 이를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2 영릉재실의 대문. 중문을 거쳐 안으로 들어가도록 돼 있다.

 

특히 조선 건국 이후인 1400년대를 전후해 능을 지키기 위한 건물을 세우기 시작했으며, 1400년대 중반에 왕릉을 건립하는 규범인 산릉제도(山陵制度)가 시행된다. 이후 각 시기별로 왕릉이 조성된 당시의 모습을 담은 ‘산릉도감의궤(山陵都監儀軌)’를 통해 왕릉 재실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고 있다.

 

 

▲ 홍살문에서 정자각에 이르는 참도. 보통의 왕릉에서는 홍살문보다 먼저 금천교를 만드는데 이곳에는 홍살문에서 정자각에 이르는 참도에 금천교가 놓였다.

 

왕릉 주변에 제사를 지내기 위한 재실이 건립되면서 일반 사대부가에서도 제사를 지내기 위한 재실이 건축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재실은 제사를 지내기 위한 목적으로 건립되는 것이어서 일반 주거건축과는 다소 다른 점을 지닌다. 재실건축이 많은 경북지방의 경우 문중에 따라서는 상당히 큰 규모의 재실도 볼 수 있다.

 

왕릉의 경우 능을 지키는 사람에게 ‘능참봉(陵參奉)’이라는 벼슬이 주어졌다. 이들이 왕릉을 지키고 제사를 주관하는 헌관(獻官)이 된다. 재실은 이들이 왕릉을 지키고 제사를 지내기 위한 공간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재실 건립 초기에는 ‘헌관방(獻官房)’이나 ‘참봉청(參奉廳)’ 등 거처하는 제관의 이름을 따서 부르기도 했다.

 


▲ 재실의 행랑공간. 오른쪽에 있는 것이 제기고다.

 

재실은 크게 제례(祭禮)공간과 주사(廚舍)공간으로 나뉜다. 주사공간은 다시 제수를 장만하는 부엌을 중심으로 관리인공간과 수장(收藏)공간으로 구성된다. 관리인공간은 관리인이 거처할 수 있는 공간을 일컫는 것이고, 수장공간은 제사에 필요한 물건들을 수납하고 보관하는 장소를 말한다.

 

조선시대 예조의 소관업무와 오례에 따른 예악문물을 기록한 ‘춘관통고(春官通考)’에 따르면 재실은 전사청(典祀廳), 제기고(祭器庫), 안향청(安香廳), 재실의 4가지 건물로 이루어졌다. 조선 초기에는 재실의 규모나 형태가 다소 다르게 나타나고 있으나 춘관통고가 만들어진 정조때에는 이들 건물형태가 재실의 기본형태로 자리잡았다.

 


▲ 영릉재실은 조선시대 왕릉의 기본형태를 두루 갖추고 있는 모델이었다.


이에 비해 일반 사대부가의 재실은 전사청과 유사실(有司室), 종주실(宗主室), 참제인실(參祭人室), 수임방(受任房), 전임실(前任室), 동서재(東西齋), 대청, 부엌, 고방(庫房) 등으로 구성된다. 종주실은 종손이 머무는 방이고, 전임실은 제사에 밝은 유사가 머무는 방이다. 참제인실이나 동서재는 제사에 참여한 문중사람들이 머무는 방이다.

 


▲ 재실의 대청. 일반 민가와는 창호의 문양이나 형태가 다소 다르다.

 

 

능제규례에 기록된 왕릉 재실의 모델

영릉의 재실은 당초 건립할 때의 규모나 모습을 지금까지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바로 이점 때문에 2007년 보물로 지정해 보존하고 있다. 왕릉이 현재의 위치로 옮겨오면서 기록된 내용에 따르면 안향청과 전사청, 참봉청, 집사청 앞에 작은 문을 두고 있었으며, 이는 각 건물이 담장으로 경계를 이루고 있었을 것으로 짐작케 한다.

 

 


▲ 재실로 통하는 중문앞에 서 있는 회양목. 천연기념물로 보호되고 있다.

 

1900년에 그려진 능제규례(陵祭規例)의 재실지도와 현재의 재실의 모습을 보면 약간의 변형이 있는 것외에 거의 비슷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1900년의 재실배치를 보면 가장 안쪽으로 전사청과 안향청, 집사청, 재실이 차례로 배치돼 있다. 그리고 그 앞으로 제기고가 있고, 가장 앞쪽에 대문과 행랑이 위치하고 있다.

 

현재의 재실 배치는 안쪽에 안향청과 집사청, 재실이 배치돼 있고, 그 앞으로 제기고가 있으며, 가장 앞쪽에 대문과 행랑이 있다. 대문에서 재실에 이르는 데는 작은 중문을 하나 거쳐야 한다. 재실과 집사청 사이에도 작은 담장과 함께 일각문이 있고, 커다란 느티나무가 하나 서 있다. 안향청과 집사청 사이에는 담장이 없다.

 


▲ 안향청의 대청. 방 뒤로 마루공간이 있는데, 당초 방으로 사용되던 공간이라고 한다.

 

능제규례에 나타난 재실의 규모나 방의 배치와 다른 부분으로는 먼저 전사청이 현재 재실에는 없다는 점이다. 전사청은 재실의 가장 안쪽에 배치돼 제물이 정자각으로 쉽게 운반될 수 있도록 위치하고 있었다. 가운데 위치한 집사청은 과거에는 ‘ㄱ’자 형태였으나, 지금은 내민 부분은 없어지고 ‘ㅡ’자형 건물만 남아 있다.

 

안향청은 1900년대에는 사방에 담장과 중문이 있는 모습이었으나 지금은 정자각으로 향하는 쪽의 담장과 중문만 남아 있다. 건물의 모습은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다만 4칸의 마루 옆에 있는 2칸의 온돌방중 1칸이 마루로 바뀌었다. 현재 남아 있는 온돌방은 헌관방으로 사용되는 공간이다.

 


▲ 안향청과 집사청. 안향청은 영릉재실부터 기본공간 형태로 자리잡았다. 

 

재실 건물은 당초 정면 5칸으로 나타나 있으나 지금은 6칸 건물로 늘어나 있다. 마루 옆 방의 앞부분이 툇간으로 바뀐 것도 달라진 점이다. 마루 오른쪽에 퇴가 없는 방이 있는데, 아마도 이 방이 새로 증축된 것으로 짐작된다. 가장 왼쪽에는 부엌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공간이 있는데 이로 미루어 이 재실은 능역을 관리하는 참봉이 거처하는 공간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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