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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이 있는 화첩]
이장희의 스케치여행

“건물이 아닌 풍경의 시간을 그려요”일러스트레이터 작가 이장희.

그만큼 서울을 잘 알고 서울을 많이 그리는 작가가 또 있을까.

서울의 고궁에서부터 역사적 건물, 길에 이르는 숱한 현장을 그림과 글로 보여주며 주목을 받아 왔다. 지금 이 시간도 어딘가에서 사라져 가는 풍경들을 남기는데 온힘을 쏟고 있을 그를, 2월 초순 정동거리에서 만났다.

취재 구선영 기자 사진 왕규태 기자 협조 www.tthat.com, bolg.naver.com/tth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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림그리기는 본성이자 습관이다

어려서부터 지나칠 정도로 낙서를 했다. 종이의 흰 면만 보이면 무조건 그림을 그려댔다. 달력조차도 버리지 못하고 글씨를 제외한 나머지 바탕에는 온통 그림을 그렸다. 어느 날은 선생님께서 교과서의 낙서를 지어오라는 숙제를 내주신 적이 있을 정도로 학창시절 내내 그림이 빼곡한 교과서를 들고 다녔다. 그렇게 시작된 그리기 습관이 지금껏 이어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스케치보다는 ‘낙서’라는 표현을 쓴다. 미술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부모님의 만류로 도시계획을 전공했다.

 


 옛서울역사

 

졸업전을 마치고 산업디자인회사에 취직했지만 거기서는 디자인을 해야 했지, 그림을 그릴 수는 없었다. 첫 직장에서 모은 월급으로 30대 초반에 미국으로 떠났고, 2년간 오로지 그림만 그릴 수 있는 시간을 보냈다. 당시 그린 뉴욕 스케치를 들고 한국에 와서 ‘아메리카, 천 개의 자유를 만나다’라는 책을 출판하게 됐다. 몇해 후 ‘서울의 시간을 그리다’라는 책을 출판하면서 전업작가의 길로 나섰다.

 

 근정전 전경

 

 

어느덧 서울 박사가 되다

서울을 더 잘 알고 싶어서다. 서울은 골동품이 아니다. 끊임없이 변화는 유기체 같다. 정말 많은 역사를 간직한 곳임에도 역사도시라고 하기에 초라할 정도로 일순간 사라져버리는 것들이 많다. 너무 안타까워서 더 열심히 싸돌아다니며 그렸다. 처음에는 서울 성곽 안쪽을 중심으로 그렸고, 점차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서울에 이런 길과 건물이 있구나! 발견하는 순간 즐거웠고 그 속내가 몹시 궁금해졌다. 그래서 ‘서울’과 관련된 책을 샅샅이 찾아 읽었다. 웬만한 길과 건물, 동네에 얽힌 과거에서 현재까지의 이야기들을 속속들이 알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 서울이야기를 글과 그림으로 집대성해보겠다는 목표가 생겼다. 답사의 느낌과 그림쟁이로서 갖는 감성을 오롯이 담아 보여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화동 그림계단

 

 

멈추니까 비로소 보이더라

나의 작업은 길 위에서 주로 이뤄진다. 골목길이나 보행도로 한쪽에 자리를 잡고 서서 그림을 그려야 한다. 그러다보니 지나다니는 사람들과 실랑이도 적지 않다. 청계천에서 그림을 그릴 때는 오토바이에 치이는 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사진이 찰나의 순간이라면, 그림그리기는 느낌의 미학이다. 나의 속도에 따라서 거리와 공간의 느낌이 달라지는데, 멈추면 그 장소가 더 잘 보이고 특별하게 느껴진다. 그 특별함을 그리고 싶은 욕구가 발동하면 이내 스케치북을 꺼내든다. 답사용 스케치북 크기는 B6. 이 한 장의 그림을 완성하는데 드는 시간은 40분이다. 지루하지도 길지도 않은 딱 좋은 시간이다. 그 이상은 서서 버티기가 힘들기도 하다. 그러다보니 내 작업은 봄부터 가을까지가 성수기이고, 추운 겨울은 비수기다(웃음). 보이는 그대로 그리는 것보다는 장소적 특성을 느낄 수 있도록 작가의 시선을 부여한다. 사실과 과장 사이에서 줄타기를 한다고 해야 할까.

 


 제주 용눈이 오름

 

 

나무, 미래유산, 문화재까지

서울의 보호수 215주 가운데 100주를 그림과 글로 기록하는 작업이 마지막단계에 와 있다. 역사도시 서울을 얘기할 때 나무를 빼놓을 수 없다는 점을 알게 된 작업이다. 도시는 변하지만 나무는 남아서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매개체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일반인이 보기 힘든 장소에 있는 나무들도 많다. 국무총리공관에 자리한 측백나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로 매우 멋졌다.

 


 

그밖에 서울시에서 지정한 미래유산 100가지를 스케치로 그렸다. 방앗간, 이발소, 헌책방, 문방구 같은 장소를 찾아다녔다. 이발소에서 직접 머리도 깎아보는 등 시간여행을 하는 것 같아 재밌는 작업이었다. 조계종 사찰 그리기도 진행 중이다. 사찰의 느낌이 이렇게 좋구나, 새삼 느끼고 있다. 그밖에 현존하는 문화재를 그림으로 남기기 위해 지방 도시를 순회중이다.

 


 보석세공아저씨

 

 

자연스러운 과거와의 공존을

서울을 그리면서 알게 된 점은 일제강점기 때보다 해방 후 급격한 개발 속에서 서울이 더 망가졌다는 점이다. 우리 모두는 서울의 아이콘이 무엇인지 잘 생각해야 한다. 조선의 아이콘이 광화문이라면, 서울의 대표 얼굴은 남대문이다. 하지만 둘 다 만신창이가 되어버렸다. 광화문 광장을 만들면서 오래된 은행나무를 옮긴 것만 봐도 그렇다. 지난 500년간 사람들이 걸어 다닌 길이다.

 


 화엄사 구층암

 

옛 세종로 삼거리(현재 사거리)에서 궁궐을 바라보던 수백년 전 백성이 되어 광화문을 오롯이 보면서 걸어볼 수 있도록 되살릴 수는 없었던 것일까. 역사문화에 대한 인식없이 무자비하게 바뀌어가는 서울이 못내 아쉽고, 지금도 사라져가는 장소들 때문에 가슴이 아프다. 손자가 거둘 수 있는 열매를 할아버지가 심어주는 심정으로 100년 후 서울을 바라봐야 하고, 내 그림에도 그런 철학을 담겠다고 다짐했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서울을 그려야 하고, 앞으로도 그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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