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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부안군 줄포면 인촌 고택]
겸손하면서도 품위와 격식을 갖춘 호남 명문가의 집

김상만 고택은 초가이면서도 기와집에 못지않은 품격과 격식을 갖춘 집이다. 안채와 사랑채 등의 채 나눔이 유교적 격식을 따르면서도 공간의 연결이 긴밀하게 이루어지는 구성을 보여준다. 다양한 수납공간을 갖추고 있으며, 곳간채나 헛간채 등은 살림살이의 규모를 짐작케 한다. 한편으로 품위를 잃지 않은 겸손함을 읽을 수 있는 집이기도 하다.

취재 권혁거 사진 왕규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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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사랑채의 퇴앞으로 사랑채의 측면이 마주하고 있다. 안사랑과 사랑채를 구분하는 담장이 있음에도 담장옆으로 한칸을 밀어낸 것은 소통을 위한 공간이 아닌가 싶다.

 

이 집은 문화재로서의 명칭은 ‘김상만 가옥’으로 돼 있지만, 실은 그의 아버지인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의 고택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는 집이다. 인촌은 좋은 평가와 비판을 함께 지니고 있지만, 일제와 건국공간에서 결코 지나칠 수 없는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그런 그가 성장기의 한때를 보낸 곳이 바로 이 집이다. 

 

인촌은 호남의 유종(儒宗)으로 일컬어지는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의 13대손이다. 하서는 조선시대 문묘에 배향된 18현중 유일한 호남출신 유학자이다. 하서의 집안은 조선 태종때 당시 왕후의 사촌동생이었던 하서의 5대 조모가 외척 제거의 화를 피해 전남 장성에 터를 잡은 이후 호남의 명문가로 맥을 이어왔다.

 

 

▲ 인촌고택으로 들어가는 입구. 문간채는 1984년에 지은 것이다. 집앞에 마을사람들이 건립한 공적비가 있다.

 

그러다가 인촌의 조부인 낙재(樂齋) 김요협(金堯莢)이 전북 고창의 거부인 정씨의 무남독녀와 혼인을 하면서 고창으로 옮겨 정착하게 됐다. 결혼으로 부의 기반을 마련한 이후 아들대에 만석이 넘는 큰 재산을 모았다. 김요협의 큰아들인 원파(圓坡) 김기중(金祺中)은 1만5000석, 동생인 지산(芝山) 김경중(金璟中)은 2만석의 거부가 됐다.

 

인촌은 원래 김요협의 작은 아들인 김경중의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그의 형 셋은 어릴 때 병사해 인촌이 장남노릇을 했다. 그런데 큰 아버지인 김기중이 아들이 없어 인촌은 그의 양자로 들어가게 된다. 고창군 부안면 봉암리에는 인촌이 태어난 생가가 있으며, 당시 이 집에는 조부와 양부모, 친부모가 모두 함께 살고 있었다.

 

 

▲ 안마당. 오른쪽에 안채가 있고, 그 앞으로 헛간채가 있다. 인촌과 일민 등의 동상이 있다.

 


인재배양과 경제자립, 언론창달을 추구한 삶

1907년에는 인촌의 집안이 고창에서 부안으로 옮겨왔다. 전하는 말로는 집에 도깨불이 많아 그리 한 것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당시 고창에 있던 화적떼들때문이었다고 한다. 부안군 줄포면은 줄포항을 통해 일본과 무역이 이루어지고 있어서 치안이 잘 유지되고 있었다. 이곳에 인촌의 양부인 김기중이 집을 지어놓았는데, 그곳이 바로 이 집이다.

 

 

1 안채 대청위에 있는 벽감. 조상들의 위패를 모시는 곳이다. 2 안채의 끝 부분에 작은 마루가 설치돼 있다. 안방에서 마루까지 퇴로 이어진다.

 

어릴 때부터 이 동네에서 자라고 현재 이 집을 관리하고 있는 신복수(申復洙, 79세)씨에 따르면, 당시 이 집을 두고 ‘원파농장’이라고 불렀다고 기억을 떠올린다. 원파는 김기중의 호다. 즉 김기중이 항구가 있는 이곳에서 일본이나 중국 등과 무역을 하기 위해 사무실을 겸할 수 있는 집을 지었다는게 신씨의 설명이다.

 

인촌은 금호학교에 입학해 근대학문을 배우고, 1908년 10월 일본으로 건너가 중등학교를 거쳐 와세다(早稻田)대학에 들어갔다. 그는 유학생활을 통해 당시 식민치하의 조국에 자원이 빈약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구국운동의 방략으로 세가지 목표를 설정했다. ‘인재배양’, ‘경제자립’, ‘언론창달’이 그것이다.

 

 

1 사랑채에서 안사랑으로 통하는 작은 문. 왼쪽에 보이는 것은 안채의 마루다. 2 안채의 부엌. 부엌 아궁이 옆에 작은 문이 있는데, 이곳이 부엌방이다. 3 안채 뒷면. 가운데 퇴와 방의 구조가 보인다. 4 안방. 이 집에는 크고 작은 수납공간들이 많다.

 

1914년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인촌은 자신이 목표로 했던 일들을 추진했다. 중앙학교(지금의 중앙중고등학교)와 고려대학교, 경성방직, 동아일보 등은 바로 그 결과물이다. 그는 교육사업과 민족자본의 육성, 언론활동 등에 힘을 쏟으면서 독립운동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독립단이 인촌을 찾아와 자금을 요구하자, 그는 금고문을 열어놓고 자리를 비운 일화도 전한다. 필요한 만큼의 돈을 꺼내가도록 자리를 피한 것이다.

1931년에는 세계일주를 마치고 돌아와 송진우 등과 함께 ‘브나드로 운동(vnarod movement)’을 펼치기도 했다. 농촌계몽운동인 브나드로 운동은 동아일보가 주도해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1938년 일제당국의 탄압으로 결국 중단되고 말았지만, 해방후 대학생들의 농촌봉사활동으로 이어진다.

 

▲ 뒤뜰에 설치된 낮은 굴뚝.

동네사람들에게 위화감을 주지 않기 위한 배려이다.

 

일제 후반기인 1942년을 전후해 인촌의 친일행적이 자료에 나타난다. 몇몇 시국강연에 나서기도 했고, 신문기고 등을 통해 징병제를 찬양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이 때문에 친일인명사전에도 올랐다. 그러나 이와 관련해서는 그의 이름이 도용됐다는 반론도 있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인촌이 창씨개명만큼은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해방후에는 한국민주당(한민당)을 결성하는 등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한국전쟁으로 부산으로 피난 가 있던 시기에 잠시 부통령을 지냈지만. 이른바 ‘부산정치파동’때 장문의 사퇴서를 발표하고 중도사임했다. 그후 야당의 통합을 위해 노력을 기울였으나 끝을 보지 못한 채 1955년 2월 세상을 떠났다. 그해 2월24일 인촌의 장례식은 서울운동장에서 국민장으로 치러졌다.

 

 

▲ 사랑채. 사랑채는 집이 기울어 보수할 예정이며, 지붕의 초가를 갈지 않은 모습이 오히려 고색창연하다. 오른쪽의 작은 문은 안사랑으로 통하는 문이다.

 


당초 사무실 겸용으로 지은 후 살림집으로 이용

인촌이 성장기의 한때를 보낸 이 집은 항구를 통해 무역을 했던 그의 양부 김기중이 회사의 사무실 겸용으로 쓰기 위해 지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종 32년인 1895년에 안채와 사랑채, 헛간채를 지었고, 고창에서 이곳으로 이사오던 1907년에 안사랑채와 곳간채를 지어 집의 모양을 이루었다. 문간채는 1984년에 건립했다.

 

대문을 들어서면 먼저 ‘ㅡ’자형의 사랑채가 눈에 들어온다. 대문과는 직각으로 앉은 사랑채는 자연석을 가지런히 다듬어 만든 1단 기단위에 앉혔다. 이 집의 기단들은 모두 자연석을 사용했다. 전체적인 집의 향이 서향인데, 직각으로 놓인 사랑채는 남향이다. 사랑방과 대청으로 구성돼 있고, 사랑방 뒤쪽 가운데 너른 퇴를 두었고, 앞쪽에도 퇴가 있다.

 

사랑방 뒤쪽으로는 작은 골방이 있다. 또 사랑채 끝에 담장을 사이에 두고 방이 안사랑쪽으로 덧붙어 있다. 아마도 이는 안사랑이 생기기 전 사랑채와 안채의 연결을 위해 만든 것인 듯하다. 방 뒤쪽으로 가운데 퇴를 두고 한편에 작은 방을 들인 형식은 이 집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 안사랑채의 전경. 이 집은 전체적으로 채와 채를 나누고 있으면서도 유기적인 연결을 꾀하고 있다.

 

사랑채 오른쪽으로는 헛간채가 있고, 그 옆으로 안채로 통하는 문이 있다. 정면 6칸 반 규모의 안채는 역시 1단의 자연석 기단위에 ‘ㅡ’자형으로 앉혔으며, 넓은 안마당을 두고 있다. 집 뒤의 산을 배산으로 하다보니 자연 서향을 하게 됐다. 1칸 규모의 안채 대청에는 상부에 커다란 벽감이 있는데 아마도 조상들의 위패를 모시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집의 전체적인 규모에 비해 사랑채나 안채의 대청규모가 작은 것도 아마도 이 집이 처음부터 살림집으로 지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과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살림집으로 지었다면 대청의 규모가 지금보다는 더 컸을 터다. 안채 대청의 벽감 또한 살림집이었다면 처음부터 벽에 만들었을 것이다.

 

안채의 공간구성은 독특하면서도 아기자기하다. 부엌 뒤편으로는 찬모가 곧바로 부엌으로 이동할 수 있는 부엌방이 있다. 대청을 사이에 둔 작은 방 옆에는 3면이 트인 마루를 놓았다. 안채 대청에는 인촌의 조부를 비롯한 가족사진과 함께 그가 설립한 학교 등의 사진이 걸려 있다. 또 한쪽에는 그가 신념으로 삼았던 ‘공선사후(公先私後)’, ‘신의일관(信義一貫)’, 등의 글씨도 걸려 있다.

 

 

 사랑마당과 헛간채. 오른쪽 문은 안채로 통하는 문이다. 헛간채에는 넓은 광이 있다.

 


위화감 줄이려 초가로 짓고 낮은 굴뚝 설치

안채 옆으로는 안사랑이 있다. 안사랑 역시 2칸의 방과 1칸의 대청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방 뒤로 1칸은 퇴를 두고 1칸은 작은 방을 두었다. 대청은 안채와 마찬가지로 앞뒤로 모두 창호를 달아놓았다. 대청에 창호를 달아둔 것은 아마도 이곳이 해안지방이라는 특성때문이 아닌가싶다.

 

안사랑에서는 이외에도 독특한 공간이 눈에 띈다. 방의 옆 아궁이쪽으로 작은 문이 나 있는 점이다. 창호의 크기가 작아 사람이 출입하기는 어려운 문으로, 안채와의 소통을 위해 만든 문이라는 게 신복수씨의 설명이다. 그리고 방 옆 바깥부분에 2단으로 된 작은 벽장이 있다. 집의 내부가 아닌 외부의 벽장은 여느 집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공간이다.

 

 

▲ 안채 마루에서 본 안사랑. 안사랑 아궁이 위로 작은 쪽문이 있다. 여느 주택에서 찾기 어려운 형식으로, 이는 안채와의 소통을 위한 것이다.

 

관리인 신복수씨의 설명에 따르면 이 마을은 인물이 많이 나는 명당이라고 한다. 또한 집을 지을 때부터 새로운 부재를 사용하지 않고 다른 집의 부재를 옮겨다 썼다고 한다. 거부이면서도 억새로 지붕을 이었다. 집의 굴뚝도 아주 낮다. 이는 동네사람들에게 위화감을 주지 않기 위함이었다는 게 신씨의 설명이다. 

 

안채의 마당에는 인촌가문의 입상과 좌상, 흉상 등이 서 있다. 호남 유학의 맥을 이어온 명문 사대부가로서, 또 호남의 부를 대표하는 거부의 집이지만, 줄포리 인촌고택에는 오히려 자연스러움과 안온함이 묻어난다. 격식은 갖추되 평범한 외양이 낮은 굴뚝이 상징하는 겸손함과 함께 오히려 집의 품위를 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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